임성빈 교수는
1991년 대한민국 최초로 조리기능장이 됐다. 호텔신라 ‘라폰타나’,'라콘티넨탈’의 총주방장을 거쳐 대한민국 요리 국가대표 단장, 감독으로 30개국에 출전했으며 WACS JURY A LEVEL 국제심사위원이기도 하다. 현재 외식산업학회, 조리학회 부회장과 한국조리사협회 중앙회 수석부회장을 맡고 있으며 백석예술대학교 외식산업학부 전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통령표창, 국회의장, 부의장상 표창 등 다양한 상을 수상했다.
50년 동안 한 길을 걸으며 후학들을 위해 세계무대로 향하는 새로운 길을 개척한 사람이 있다. 바로 한국 1호 조리기능장인 백석예대 외식산업학부 임성빈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조리업계와 관련 학교가 코로나19로 인해 큰 어려움에 부딪힌 지금, 그동안 조리 외길을 걸어오며 갖은 풍파를 돌파, 50년의 세월을 지켜온 임성빈 교수를 만나 그가 그동안 걸어온 길과 앞으로의 조리업계에 바라는 점을 들어 봤다.
한 분야에서 50년. 인생의 절반 이상을 조리업계에 몸담으셨습니다. 조리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실 것 같은데 업계에 입문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처음부터 요리를 한 건 아니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 이후 중학교로 진학하고 싶었으나 가정 형편이 여의치 않았죠. 그렇게 1972년도에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제과공장에 기술을 배우기 위해 입사했습니다. 연탄을 지펴 빵 가마에 불을 피우고, 앙꼬와 반죽을 만들고 포장해 배달했죠. 그렇게 1년을 무보수로 일했습니다. 계속 베이커리를 전공하려고 했으나 당시 형수가 빵으로는 돈을 벌지 못한다며 요리하면 어떻겠느냐고 추천해 김종필 총리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물론 들어가서 바로 요리를 배우진 못했죠. 서빙부터 그릇 닦는 일까지 궂은 일을 도맡으며 곁눈질로 식당이 움직이는 것을 익혔습니다. 본격적인 요리는 1974년도에 반도 유스호스텔에 들어가서야 시작하게 됐고요.
요리를 시작하시고 난 뒤 경력은 어떻게 쌓아오셨나요?
요리를 시작한 74년도만 해도 프랑스, 이태리 요리가 활성화되지 않았고 ‘서양요리’라고 묶여 불릴 때였습니다. 쉽게 말해 ‘햄버거 스테이크’가 서양요리를 대표할 정도였죠. 한식이나 베이커리 디저트도 매력적이었지만 가장 멋있게 느껴졌던 양식을 전공 요리로 택했습니다. 영어, 이탈리아어, 불어, 프랑스어 등 배울 게 많아도 요리와 관련된 모든 공부가 좋았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일하는 바람에 배움에 관한 갈망이 있기도 했고요. 반도 유스호스텔 이후 사보이 호텔, 라마다올리피아 호텔 등 일을 배울 땐 많이 돌아다녔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여러 호텔에서 약 10년 간 경력을 쌓은 뒤, 지금도 그렇지만 당대 최고 호텔이었던 신라호텔에 입사하고 싶어 중학교 검정고시를 봤습니다. 그리곤 10년 이상의 경력 사원을 뽑는 공고에 28대 1로 합격했죠. 일을 하며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보고 경희 호텔경영전문대학도 1기로 들어갔습니다. 학교를 다니며 기능장 제도를 알게 돼 시험에 응시, 합격하게 됐구요.
11년간 공석이던 기능장에 국내 1호로 합격하셨습니다. 그 과정은 어땠나요?
당시는 기능장 응시 자격 중 ‘경력 16년 이상’이 있었고 필답고사, 실기고사가 있었습니다. 한식, 양식 모두 봐야 했죠. 시험을 꼬박 1년 준비했습니다. 70명이 응시해 롯데호텔에 있던 사람과 저, 두 명이 합격했죠. 35대 1의 경쟁률이었습니다. 꿈인가 생신가 싶었습니다. 당시 오랜 경력으로 익숙해진 일과 조리업계에 대한 비전을 느끼지 못했던 터라 ‘돌파구’가 필요했던 제게 무엇보다 값진 선물이었습니다. 그렇게 최초 기능장이 되고나니 조리사로서 좀 더 나아가고 싶다는 욕망이 커졌습니다. 기능장 합격 이후엔 신라호텔에서 특진이 됐고, 이태리와 프랑스에 연수도 가게 됐습니다. 그야말로 날개를 달았던 거죠. 그렇게 계속된 노력 끝에 프렌치 레스토랑인 ‘신라호텔 라 콘티넨탈’에서 총주방장을 맡게 됐습니다.
이제는 현업에서 물러나 후학양성을 위해 백석예술대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교수로서는 어떤 사명감을 갖고 계신가요?
교수로서 후배들을 보며 가장 강조하고 싶은 점은 조리로 하여금 더 큰 세상에 눈 뜨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학생들과 함께 각종 국내외 요리대회에 출전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죠. 특히 견문을 넓힐 수 있는 해외 요리대회는 매년 두 세 군데씩 꼭 출전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태국, 싱가포르, 러시아, 독일, 홍콩, 필리핀 등에서 개최된 대회의 국가대표 감독, 단장으로 출전해 좋은 성적을 거뒀죠. 외국 대회에서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대회에 나갈 때 제 유니폼을 입고 나간 학생도 있었어요. 제가 한 일들을 제자, 후배들이 이어 받고 있다는 것이 뿌듯할 따름입니다.
조리 분야에 몸담고 50년이 흘렀습니다. 감회가 어떠신가요?
지금이야 셰프가 장래희망으로 떠오르는 직업이지만 그동안 조리사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직업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전문성을 어필할 기회가 없었던 저보다 후배들은 직업으로서 조리사의 영역을 존중받을 수 있도록 대회를 지원하고, 각종 대외활동에 나서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가르친 후배들이 지금 다 잘 돼서 호텔의 요직에 있는 것을 보면 몹시 뿌듯해요. 한국조리기능장협회의 배지, 유니폼, 정관 규정을 만든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돌이켜보면 공부를 참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신라호텔 콘티넨탈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일하며 불어를 공부했고, 라폰타나에 발령받았을 땐 이태리어를 배웠습니다. 회사의 교육이란 교육은 전부 받아 특진도 세 번이나 했죠.
후배 요리사들, 그리고 조리업계에 바라는 점은 무엇입니까?
요즘 조리사들은 끈기도, 지구력도 없고 노력도 잘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옛날처럼 배고파서 요리하는 시대는 끝났죠. 학교 오면 요리사 되는 줄 아는 학생들이 있는데, 훌륭한 조리사는 끊임없는 수련과 공부가 필요하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특히 텔레비전에 나와 위생을 다 갖추지 않고 요리하는 후배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요리사라 하면 기본적으로 복장을 다 갖추고 위생을 철저히 지켜야 하는데 말이죠.
한편 조리사의 처우가 아직 전문직에 걸맞지 않은 것은 조리업계에 아쉬운 부분입니다. 특히 호텔 레스토랑에서는 계약직 직원들을 계약만료라는 이유, 정규직을 채용하지 않는 곳들이 속속 있습니다. 다행히 셰프의 위상이 사회적으로 점점 높아지고 있고, 미식의 영역이 넓어지며 이들의 노력을 알아주는 문화가 조성되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 속에 조리업계는 셰프들을 전문직으로, 대체불가한 영역으로 존중해주길 바라는 바입니다.
교수님의 요리철학과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 주신다면?
요리사는 사회에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만든 요리를 누군가가 먹고, 건강을 유지하며 자기 일을 성실하게 해낼 수 있으면 되죠. 요즘엔 요리 봉사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양평의 다문화 가정 친구들이 요리 배우는 걸 좋아한다고 들어서 그곳으로 갈 것 같습니다. 요리로써 누군가를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제가 할 일입니다.
글 : 홍승주 / 디자인 : 서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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