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오락 프로그램에서 개그우먼 이영자가 고급 요양 시설을 방문하는 장면을 보게 됐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세워진 이 곳은 메디컬, 문화, 커뮤니티 서비스를 이른바 호텔식으로 제공하는 럭셔리한 공간이었다. 이를 보면서 이제 한국에도 고령자들이 보다 더 행복해 질 수 있는 다양한 시설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떨까? 분명 ‘노인의 나라’라는 수식어에 맞게 일본은 이미 오래 전부터 다양한 요양 시설이 생겨났고 진화를 거듭해오고 있지만, 의외로 호텔처럼 근사한 공간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운영면에서는 주목할만한 진주같은 보석을 발견해낼 수 있었다.
독특한 시도와 발상의 전환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 시설들을 통해 고령자들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이들이 더 행복해 질 수 있는 방법은 또 어떤 것들이 있는지 고민해 보고자 한다.
‘관리’에서 ‘자존감’으로 - 일본의 획기적인 요양시설
요양 병원을 방문하면 마음이 무겁다. 병원 시설이나 신체 건강 정도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큰 병실에 침대가 줄지 어 있고 노인들이 병원 잠옷을 입고 누워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조금 건강한 경우에는 앉아서 텔레 비전을 볼 수 있지만 마음대로 침대에서 내려와 걸어 다닐 수는 없다. 낙상의 위험 때문에 병원에서 취한 조치들 때문이다. 이에 요양병원에 입원하는 순간부터 다리 근력이 약해지고 결국 걷는 법을 잊게 된다. 요양병원에 입원한 노인들도 방문하는 가족들도 모두 슬플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일본의 요양시설들 중에는 새로운 시도로 이러한 문제를 극복한 곳들을 찾아볼 수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고령자들이 스 스로 자유롭게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준다는 점이다.
고령자의 ‘자존감’에 집중한 긴모쿠세이(銀木犀)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진화된 일본의 요양시설 중에서도 획기적인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 들어가면 입구에서부터 다른 에너지가 느껴진다. 초등학생 정도 돼 보이는 아이들의 소리가 왁자지껄하다. 연세가 지긋하신 어른들의 공간일 것이라는 일차적인 고정관념이 무너지는 순 간이다. 구멍가게 같은 매점도 특이하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캐릭터 스낵류와 장난감들이 주요 상품 군으로 구성돼 있고, 고객은 아이들이며, 팔고 있는 사람은 이곳에 거주하는 87세 할머니다. 할머니는 걷는 것도 힘들고 계산도 잘 안되지만 아이들이 대신 셈을 해서 돈을 지불한다. 이상한 상황이지만 모두 표정이 그렇 게 밝을 수 없다.
뿐만 아니다. 이곳에서 생활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자세히 보면 요양시설에 있다기 보다는 집에서 생활하는 것 같다. 스스로 세탁실에서 빨래를 해서 널고, 정원의 꽃을 가꾸고, 혼자 산 책을 하고, 집에 친구들이 놀러온 것처럼 소파에 앉아서 담소를 나눈다. 이쯤되면 건강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모인 공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들 대부분은 치매를 앓고 있고, 거동조차 자연스럽지 않은 분들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장면이 연출될 수 있는 것은 바로 노인들의 ‘자존감’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직원들이 적극적으로 ‘관리’하고 ‘요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한 발짝 떨어져서 노 인들이 스스로 움직이고 생활할 수 있도록 한다. ‘관리’는 의존 을 하게 만들고, 의존도가 커지면 삶에 대한 의욕이 역시 줄어 들기 마련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가급적이면 노인들이 자유롭게 지낼 수 있도록 만들고 이를 통해 자존감과 삶에 대한 건강한 의욕을 키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이곳의 방침이다.
마을 사람들과 이어주는 구멍가게
이렇게 독특한 요양시설이 탄생된 것은 바로 긴모쿠세이를 운영 하는 주식회사 실버우드(シルバーウッド)의 시모가와라 타다미치 (下河原忠道) 사장의 철학 때문이다. 시모가와라 타다미치는 원래 철강회사를 운영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한 후 가업을 이어받았다. 그가 미국 유학 시절 배운 철강 공법을 건축 현장에 활용하는 기술을 통해 회사를 성장시켜 나가던 어느 날, 시모가와라는 고령자 요양시설의 건축 현장에 철강을 납품을 하게 된다. 그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건축주에게 고령자 요양시설 은 왜 하나같이 폐쇄적인 구조로 외부와 단절돼 있는지 물어보게 되는데, 돌아온 답은 “당신이 노인 요양 사업을 한번 해 보 고 그렇게나 말해 보시지?”하는 싸늘한 반응이었다. 예기치 못한 반응해 당황한 시모가와라 사장은 그 뒤로 밝고 오픈된 요양 시설을 만드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일인지 고민을 하게 됐다. 그리고 고민 끝에 그는 일본의 노인요양 사업을 바꿔 보겠다고 결 심했다. 노인들이 마지못해 거주하게 되는 공간이 아니라, 정말 집처럼 살고 싶은 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 후 곧바로 미국, 덴마크, 프랑스, 한국 등의 요양시설을 시찰하 고 스스로 의문을 제기했던 부분을 해소하는 요양시설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된 긴모쿠세이는 다른 고령자 요양 시설과는 확실히 다르다. 먼저 공간의 분위기는 어두운 이미지가 전혀 없이 굉장히 밝다. 입구를 지나면 단단한 노송나무를 사용한 밝은 컬러의 바닥과 현대적인 조명, 벽면에 책이 진열된 라이브러리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에는 고령자 요양 시설이라고는 생 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개방적인 카페테리어 공간이 있다. 이곳 은 낮에는 아이를 키우는 젊은 엄마들로, 오후에는 학교를 마친 초등학생들로 북적인다. 그리고 카페테리아의 한 켠에는 이 곳에 거주하는 할머니가 소일거리로 운영하는 구멍가게가 있다. 시모가와라 사장이 긴모쿠세이를 이처럼 지역에 개방된 고령 자 요양 시설로 만들고, 거주하는 할머니가 예전에 운영하던 과자 가게를 시설 내에서 계속 운영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치매와 인지력 저하라는 고령자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들 스스로가 일상적인 일을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하면서 자연 스럽게 치유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우리나라보다 고령자들에 대한 배려가 대체적으로 잘 돼 있는 편이라고는 하지만, 일본 역시 대부분의 고령자들이 요양시설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예전의 지적 신체적 능력보다는 쇠퇴하게 된다. 모든 시설이 고령자의 안전관리를 우선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긴모쿠세이는 이러한 시설 운영의 시점을 180도 바꿔 고령자들이 스스로 가능한 모든 것을 직접 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자존감을 지키려 는데 초점을 맞췄다. 이 시설의 고령자들은 식당에서 스스로 밥을 가져와서 먹고, 세탁하고, 청소한다. 물론 난감한 상황이 벌어지면 스텝들이 도와주지만 가능한 그들의 자존심을 존중 하는 해결책을 찾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고 령자들은 때때로 공원을 청소하거나, 지역주민과 마츠리도 즐긴다. 그야말로 다른 시설처럼 요양시설에 갇혀 있는 모습이 아니라, 그 지역에 거주하는 나이 많은 주민으로 행동하고 지 역과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긴모쿠세이의 고 령자들은 지역의 빈곤 가정의 아이들을 요양시설의 카페테리 아에 초대해 자신들이 식사할 때 같이 밥을 먹도록 하는 사랑 을 실천하기도 한다. 돌봄을 받고 있는 고령자가 다른 사람을 돌보는 특이한 관계를 형성하는 이런 모습은 정말 이례적이다.
지팡이를 짚고 와 걸어서 생활하게 되는 곳
일반적으로 요양시설에 대한 지역의 인식은 부정적이다. 요양 시설을 건설한다고 하면 지역에서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나기도 한다. 시모가와라 사장은 요양시설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바뀌지 않고서는 고령자들이 시설에 있어도 행복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지역과의 관계 형성에 공을 들여 먼저 지역으로 다가갔다. 고령자의 요양시설 역사에서 아무도 하지 못 했던 생각을 실천으로 옮긴 것이다. 그래서 긴모쿠세이의 근처 주민들은 이 시설의 고령자들에 대한 이해가 깊으며, 지역 전 체가 긴모쿠세이의 고령자를 돌보는 듯한 환경이 형성됐다. 이처럼 긴모쿠세이는 고령자 돌봄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꿨고, 일본의 고령자 서비스가 전 세계의 새로운 모델로 주목받는 계기를 마련했다. 실제로 긴모쿠세이의 고령자 돌봄 서비스는 싱가포르에서 개최된 제3회 아시아 태평양 지역 고령자 케어 이노베이션 어워드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국제적인 평가를 통해 그 모델의 가치를 인증 받은 것이다.
긴모쿠세이에 거주하고 계시는 90세 가까운 한 할아버지의 습이 기억에 남는다. 그는 매일 이 시설의 정원에 핀 꽃을 마치 자신의 집 정원처럼 가꾼다. 이곳에 처음 들어올 때는 지팡 이를 짚고 들어왔지만 이렇게 스스로 움직이고 일거리를 찾아서 생활하면서 이제 지팡이 없이 걸어 다니고 있다고 한다. 그 리고 그는 꽃을 가꾸는 이유가 내년에도 살아서 꽃을 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한다.
노인도 가족도 모두 슬프게 만드는 우리의 우울한 요양 시설 과 스스로 자존감을 찾아가는 긴모쿠세이의 모습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제 우리도 관리와 효율보다 고령자의 마음을 들여다 보는 자세를 먼저 배웠으면 한다. 긴모쿠세이_ www.ginmokusei.net/ichikawa
전복선
Tokyo Correspondent
럭셔리 매거진 ‘HAUTE 오뜨’ 기자, KBS 작가 호텔 농심 마케팅 파트장을 지낸 바 있으며
현재 도쿄에 거주 중으로 다양한 매체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글 : 전복선 / 디자인 : 서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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