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Res & Cafe,Bar

호텔 & 레스토랑 - “어깨에 뽕 빼고!” 청년, 다시 국자를 잡다 에렉스에프엔비㈜ 최형진 운영지원 총괄셰프




“어깨에 뽕 빼고!” 청년, 다시 국자를 잡다

에렉스에프엔비㈜ 최형진 운영지원 총괄셰프





중식 셰프를 섭외했다고 생각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한식 셰프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순도 100% 대한민국 순수 청년, 최형진 셰프.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도 자장면, 짬뽕, 탕수육을 중국요리로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다부진 셰프의 인생, 쇠망치로 내리쳐도 쉽게 부서질 것 같지 않다. 그의 인생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인내와 집념 그 어디쯤일까.


취재 노혜영 기자 | 사진 조무경 팀장


<쿡가대표>, 비밀 병기 되다


중국 사천에서 세기의 요리대결이 펼쳐지고 있는 현장, 이미 점수는 1:1인 상황이다. 마지막 요리의 비주얼은 중국이 한 수 위인 것은 분명하다. 이번 대결은 졌다고 봐야하나. 연장전의 마지막 패에 대결의 승운이 달려있다. 화려한 상대팀의 요리에 비해 다소 부족해 보이는 이 작은 딤섬 디저트로 평가단의 미각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인가? 결과가 발표되는 순간, 탄식은 탄성으로 변했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평가단 5인 중 4인의 선택으로 한국팀의 승리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삽시간에 실시간 포털 검색창이 뜨겁게 달궈졌다. 사천의 최강 드림팀에 대항한 한국팀의 비밀병기로 등장한 인물, 바로 최형진 셰프다.


“연출이 아닌 실제 상황이죠. 손에 땀을 쥐게 했어요. 상대팀은 두바이 세계요리대회의 우승자로 디저트 전문가였으니까요. 저는 초콜릿 딤섬을 만들었는데 초콜릿이 주재료니 초콜릿을 최대한 돋보이게 하려고 했어요. 초콜릿, 라즈베리, 크림치즈를 딤섬 피로 감싸 튀겨 한 입 베어 물면 부드럽게 녹은 초콜릿이 톡 터져 나오며 입안을 감싸는 게 이 요리의 포인트 입니다.”


이번 대결 최대의 난제이자 라이벌은 중국팀이었다. 1:1 연장전에 돌입한 상황. 앞서 한국팀이 5:0으로 완패했기에 부담은 배로 밀려왔다. 더욱이 최형진 셰프는 한국팀의 비밀 병기가 아닌가. 한편으로는 1승을 이끈 이연복 사부의 이름에 누가 될까 최선에 최선을 더했다. 하지만 중국팀의 계략도 만만치 않았다. 대결에 앞서 디저트의 일부를 미리 만들어 놓기도 했고, 딤섬 피에 필요한 밀가루를 중력분이 아닌 강력분으로 바꿔서 준다거나 요청한 재료를 숨겨두고 주지 않는 등 방해도 심했다. 우여곡절 끝에 승리를 거머쥔 순간, 안도의 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었다. 승리의 기쁨보다 사부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웠다.


“다음날 핸드폰으로 100여 통에 달하는 축하 메시지가 왔어요. 일하는 매장으로 찾아온 손님이 긴 줄을 서서 대기할 정도로 방송이 나간 뒤 축하와 격려해주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그러나 여전히 스포트라이트는 부담스럽다. 요리대결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관심을 받긴 했지만 요리 자체의 경쟁보다 나의 실수가 다른 사람들이 쌓아놓은 노력에 피해가 될까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 번의 대결을 위해 한 달 밤샘 준비는 기본인 터. 힘들게 쌓아 온 노력의 대가代價가 있었기에 지금의 최형진이 셰프의 반열에 서 있는지 모른다.




스물 넷, 이른 나이에 철이 들다


어렸을 때부터 꿈이 요리사였다. 맞벌이를 하시는 부모님 대신 형에게 밥을 해주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엄마가 칭찬을 많이 해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칭찬 때문에 요리가 재밌었나 보다. 목표가 있었기에 고민할 필요도 없이 요리를 시작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호텔에서 견습생으로 일을 배우다가 군대에 갔고, 제대 후 1주일 만에 친척이 살고 있는 사이판으로 건너갔다. 버블티, 슬러시, 팥빙수,김밥 등 당시 사이판에는 없는, 한국에만 있는 스낵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장사도 잘됐고 이슈거리가 돼 지역 신문에 실리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던 중 미국에 9.11 테러가 발생했고 외국인에 대한 단속이 강화됐다. 결국 불법 체류자라는 명목으로 가게는 물론 냄비 하나도 건지지 못하고 전 재산을 압류 당한 채 1억 원에 가까운 빚만 떠안고 강제추방됐다. 그때 나이 24살. 어린 나이임에도 사업을 하고 싶었다. 돈을 많이 벌어 터를 잡고 한국에서 부모님을 모셔와 함께 사는 행복한 삶을 머릿속에 그리곤 했다. 그러나 소박한 꿈은 그렇게 아스라이 멀어졌다.


“겉멋만 잔뜩 들어가지고는... 결국 집안에 피해만 줬구나 생각하니 잠도 안 오더라고요. 우울증도 겪고 한국에 돌아와 한동안 많이 방황했어요. 부모님은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갓 제대한 아들의 꿈에 종잣돈을 모아 주셨거든요. 그런데 빚만 가득 안고 돌아왔으니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었죠.” 긴 암흑에서 방황하던 어느 날 ‘내가 이대로 주저앉을 것인가?’라며 자신에게 되물었다. 그 길로 홀리데이 인 서울 호텔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중식당 막내로 들어가 독종 소리를 들어가며 정말 열심히 일했다. 이것 아니면 죽는다는 각오로 4년간 하루 14시간씩 일하면서도 쉬어본 날이 없었다.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그래야만 했다. 남들에겐 직업이지만 그에게는 생존과도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묵묵함과 성실함은 곧 화교 사부들에게 화젯거리가 됐다. 그리고 사부들의 추천으로 중식계에서 명성이 높던 여경래, 여경옥, 이연복 셰프의 수제자가 됐다. TV프로그램 <쿡가대표>에서 이연복의 수제자로 알려진지라 스승 이연복과 수제자 최형진의 인연이 궁금했다. “어느 날 이연복 사부님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밥 한 끼 같이 먹자시며 만난 게 계기가 돼 벌써 8~9년이 다 돼가네요. 모두 훌륭한 사부님들이신데 제겐 감사한 일이죠.”라며 소박하게 말을 잇는다.




“그렇게 쉼 없이 달리다보니

1년 후엔 아래로 둘이 생기고 둘이 넷 되고

어느 순간 나보다 먼저 들어온 사람이 내 뒤에 있더라.”



2012 ‘싱가포르 세계요리대회’ 출전 요리



중식당 최초의 한국인 주방장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당시 내로라하는 중식당 주방은 화교들이 꽉 잡고 있을 때인데, 에렉스에프엔비㈜가 운영하는 유명 중식당 홍보석에 서 주방장으로 화교 출신이 아닌, 최형진 셰프를 지목했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게 웬 말인가! 한국의 주방에서 한국인 주방장이 최초라니. 그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며 화교의 역사부터 꺼내들었다. 1880년 청일 전쟁 이후 중국 산동지방에 살던 중국인들이 인천으로 유입돼 중국인을 대상으로 장사를 했는데, 1948년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중국과의 교류가 끊기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되자 한국에 남은 화교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한국인을 대상으로 장사하게 됐다. 화교들이 운영하는 요릿집이 성황을 이루자 정부는 각종 규제로 화교를 통제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대만이나 미국으로 이주해 국적을 취득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에 남아있는 이들이 각종 규제와 차별을 피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할아버지,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는 일이었고, 정부가 지원하지 않는 비싼 학비를 감당할 수 없어 학업을 포기하고 주방으로 들어가기도했다. 그들에게 요리는 전부였기에 주방을 뺏기면 모든 것을 잃는 것과도 같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화교들은 입지를 다지고자 더욱 결속하게 됐고, 중식당의 주방은 한국 사람이 오르기 힘든 자리로 수십 년간 유지됐다. 결국 과거에는 이런 간극을 극복하지 못해 화교와 한국인은 때론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었다.


한국인 주방장이 설 수 없었던 구조를 설명하기에 앞서, 지금 한국의 중식이 있기까지 토대를 마련한 그들의 노고를, 시대적 상황을 먼저 알리고 싶었다. 최 셰프는 스물여덟의 나이로 최연소, 최초의 한국인 주방장이 됐음에도 주방장으로 있던 7년간 마음껏 쉴 수 없었다. 주방장에 의해 맛이 좌우될 정도로 그의 빈자리는 언제나 티가 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 중식은 주방장의 국자질에 의해 음식 맛이 결정 난다고 할 정도로 주방장에 의존하는 시스템입니다. 주방장이 자리를 비우면, 웍Wok 맛이 바뀐다고 하죠.”


2012 ‘싱가포르 세계요리대회’ 출전 당시 사진.

한국인 최초, 최연소 2관왕에 오르며 화제가 됐다



주방장, 빗자루 들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


시간이 마치 거꾸로 흘러가듯, 미국 피에프 창P.F. Chang’s의 주방에서 최 셰프가 다시 빗자루를 들고 섰다. 피에프 창은 아시아 요리로 미국에서 성공을 거둔 유명 아시안 비스트로 레스토랑이다. 피에프 창의 요리를 한국에 들여올 계획으로 본사가 그를 미국으로 연수를 보냈다. “자부심이 컸죠. 이래봬도 내가 주방장인데, 미국에서 뒤쳐지겠어? 한국 중식의 맛을 보여줄게! 했죠.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덩치도 좋고 팬 돌리는 것도 국자질도 나보다 더 잘하더라고요.” 그때부터 자존심 따위 버리고 빗자루질, 설거지 등 온갖 굳은 일을 도맡아하면서 다시 맨 아래에서부터 차근차근 배워갔다. 피에프 창의 시스템은 한국의 주방과 비교하면 10년 이상 앞서 있었다. 한국 중식은 주방장에 따라 음식이 좌우되는,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구조였으나 피에프 창에서는 누구나 다 똑같은 맛을 낼 수 있었다. 주방장은 자신이 만드는 음식을 누가 만들어도 같은 맛을 내도록 하는 관리자였다. 내가 아니어도 레스토랑에서는 항상 품질과 맛이 유지됐고 이는 곧 고객만족과 연관됐다. 이 시스템을 한국에 가져가야 했다. 한국 중식에 꼭 필요한 시스템이었고, 피에프 창을 한국에 반드시 성공시켜야겠다는 목표가 있었기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배우는데 몰두했다.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이 가까워지자 피에프 창의 창립자인 필립 창이 고마움의 표시로 트로피를 만들어 줬다. 그동안 트레이닝을 받았던 사람 중에 이렇게 독한 사람은 처음 본다며 피에프 창이 한국에 오픈하면 적극 도와주겠다는 약속도 했다.



“주방은 나 혼자 잘나서 하는 게 아니라

모두의 협력으로 품질과 맛이 유지돼요.

내가 아니면 안 되는 게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게 하는 것.

그게 바로 내 일이었던 거예요.”




한중식의 발전을 위해


최 셰프가 대뜸 묻는다. “중식하면 뭐가 떠오르세요?” 짜장면, 짬뽕, 탕수육... 생각할 것도 없이 나온 답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던 그가 이런 이야기를 해줬다. 사실 우리가 중국요리라고 부르는 짜장면, 짬뽕, 탕수육은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한국에만 있는 요리이다. 그래서 이들 요리를 한국식 중화요리 즉, 한중식으로 명칭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 화교가 인천에 정착하며 한국인을 상대로 장사를 하던 것이 오늘날 한중식의 원류가 됐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짜장면, 짬뽕, 탕수육은 국물과 채소를 좋아하고 빨리 먹는 한국인에 맞게 진화한 요리이다. 아직도 인천 차이나타운에는 공화춘이 남아 그 맥을 잇고 있다.


“120년을 이어온 역사가 끊어지면 안돼요. 없어진 요리를 발굴하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죠.”


그렇기에 <중화대반점>의 출연은 최 셰프에게 의미를 더했다. 없어진 음식을 살려보자는 취지로 80여종의 한중식을 연구해 선보일 기회였고 그런 한중식이 이슈가 되면서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사부님들이 만들어온 한중식이 수백 가지나 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비법으로 전수되다시피 해 남아있는 것이 많지 않지요. 다시 말해 시스템화가 돼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런 현상은 한식과 중식에서 특히 심해요. 또 후라이팬 잡기까지 5년, 10년이 걸리는 데다 하루 14시간에 달하는 열악한 노동환경은 웬만해선 버텨내기 힘든 구조이지요. 그렇다보니 젊은 인재가 부족할 수밖에요.”


주방의 문제점을 꼬집은 최 셰프는 한중식, 더 나아가 한식의 발전을 위해 열악한 주방 환경의 변화가 시급하고 지적한다. 또 이를 위해 레시피 등의 체계를 갖춰 주방이 운영돼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최근 중식 주방장들이 이슈가 돼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고 후배들이 따르는 현상도 반갑지만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보다 TV에 비춰지는 것에만 관심을 두는 것은 달갑지 않다.



10년 된 국자. 최 셰프가 처음 주방장이 됐을 때부터 함께했다.




한식 세계화에 관한 뼈대 있는 생각


한중식을 체계화해 세계에 역수출 하는 것. 피에프 창을 경험하며 생긴 꿈이다. 피에프 창에서 선보이는 요리는 분명 아시아 요리이다. 여기에 미국 주방의 시스템을 도입해 본토가 아닌 미국에서 성공을 거뒀으니, 미국에서 중식요리를 세계화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 셰프는 피에프 창이 세계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로 주방의 체계화를 꼽았다. 피에프창의 특징인 No MSG, Hand-made는 체계화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다른 데에 소비할 에너지를 오직 메인요리에만 집중할 수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중식은 한국에서 파생돼 뿌리내린 한국의 음식입니다. 조리법에 중식적 요소가 가미됐고 웍을 사용한다는 게 다르지만 한식과 일맥상통한 면이 많아요.”


최 셰프의 말대로 한식과 한중식은 계량화, 레시피화, 열악한 노동환경 등 주방 체계나 현실적인 면에서도 닮은꼴이 많다. 최 셰프는 얼마 전 한식의 세계화와 한국의 식문화 개선에 대한 내용을 담은 SBS의 한 다큐멘터리에 출연했다며 당시 느꼈던 생각을 가감 없이 전했다.


“한식 세계화로 인해 모던 한식이라는 장르가 생겨난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에요. 하지만 너무 파인 다이닝에 치우쳐 대중이 즐기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한식은 한 사람이 전부를 만들기 어려울 정도로 손이 많이 가고 그만큼 노동 강도도 센 편이라서 누구나 쉽게 만들고 즐기기 쉽지 않아요. 한식이 세계화되려면 국적을 불문하고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하거든요. 한식의 고질적인 문제가 반찬의 수로 경쟁하는 건데, 그 결과 주 메뉴의 퀄리티는 떨어질 수밖에 없고 음식물 쓰레기는 물론, 염분 섭취량도 늘어나게 돼요. 반찬은 따로 비용을 받더라도 메인 메뉴에 더 신경을 써 외국 사람들도 그들의 나라에서 한식당을 열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Epilogue#


첫 만남에 명함을 주고받을 겨를도 없이, 그의 입에서 쉴 새 없이 이야기가 쏟아졌다. 나도 모르게 그 이야기에 심취해 명함을 만지작거리던 손도 멈췄다. 30분 정도 흘렀을까 시계를 보니 이미 한 시간은 훌쩍 넘어가 버렸다. 셰프 최형진. 각종 국제요리대회에서 한국인 최초, 최연소 수상자 등의 타이틀을 달았지만 사부님들이 기회를 많이 준 덕분이라며 자신을 낮춘다. 그 역시 후배들에게 기회를 돌려주고 싶다고. 그 토대를 만들어주는 일, 최 셰프는 오늘도 한중식의 발전을 위해 달린다. 그의 인생을 잠시 들여다보니 ‘쉼표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열심히 뛰었다. 목표가 분명했고 노력이 남달랐다. 문득 그의 SNS에 달려있는 닉네임이 생각났다. ‘하면 된다’ 이 흔한 문구를 그냥 흘렸는데, 최 셰프를 만나고 보니 그의 인생을 담은 말인 것 같다.





The Chef. 최형진


글로벌 브랜드 PF Chang’s 총주방장

한국중식 조리사연합회 부회장

중식 국가대표 조리 팀장 역임

중국, 싱가포르, 대만, 홍콩, 등 각종 세계 요리 대회 출전

2011 외식업분야 혁신적인 젊은 리더 선정

2012 ‘싱가포르 세계요리대회’ 2관왕

2012 국제 중식조리 명사 선정

2015 사단법인 대한민국 한식협회 ‘중식고수’ 선정

前) 농림수산식품부 한식 세계화과정 자문위원

前) 신흥대학교 호텔외식경영 외래교수

SBS 생활의 달인 ‘차세대 중화요리의 달인’ 선정

SBS 플러스 ‘강호대결 중화대반점’ 우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