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Res & Cafe,Bar

호텔앤레스토랑 - 3인 3색 셰프의 스펙트럼을 뛰어 넘다

 

봄이 무색할 정도로 눈발이 쏟아지던 3월의 어느 날, 3명의 셰프를 만났다. 음악과 패션과 춤을 사랑하던 젊은 시절, 그들은 알았을까? 한 때는 감각적인 패션 디자이너가 되길 바랐고, 박수갈채 속의 트럼펫 연주자를, 화려한 스폿라이트를 받는 아이돌 스타를 꿈꿨던 3인의 예술인이 지금은 나란히 셰프의 길을 걷고 있다. 다시 시간을 돌린다 해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까? 그 무엇으로도 설명될 수 없는 예술인의 본능이 숨어있던 셰프의 감각을 깨웠다. 차디찬 겨울바람이 가시고 온기를 가득 품은 봄이 움튼 싹을 틔우듯 말이다.

 

파크 하얏트 서울(더 라운지, 한식) 김희중 셰프

 


파크 하얏트 서울에서 ‘강남 컴포트 퀴진’을 선보이며 모던 한식의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 더 라운지 수 셰프,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한식을 연구하는 섬세한 감각의 실력파 셰프이다. 트럼펫을 전공했고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며 음악가의 꿈을 키웠지만 스물일곱, 인생의 기로에서 새로운 결단을 내렸다. 레스토랑 주방에 말단으로 들어가 설거지부터 시작해 호텔 셰프가 되기 위한 꿈을 키우며 호주로 떠났다.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스시조, 일식) 한석원 셰프

 


평범한 것은 싫다. 범상치 않은 감각의 소유자, 한석원 셰프.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의 일식당 스시조의 수장으로서 자갓서베이의 맛 부문 1위를 석권하게 만든 공로자이다. 옷이 가득한 집에서 옷에 파묻혀 사는 것을 바랐을 정도로 옷을 사랑한 부산 사나이는 개성 넘치는 패션 감각은 물론 유머 감각까지 겸비했다. 패션과 영화, 나이트클럽을 좋아했던 스물다섯 살 청년은 패션 공부를 위해 떠난 일본에서 셰프의 재능을 발견했다.

 

그랜드 워커힐 서울(금룡, 중식) 이산호 셰프

 


그랜드 워커힐 서울의 중식당 금룡에서 최연소 주방장 타이틀을 달았다. 17년차 경력의 베테랑이지만 신참 때 감히 불판(불을 사용하는 조리 공간으로 중식 주방 권위의 상징)에 섰다가 국자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말썽 없이 학창시절을 보냈지만 음악과 춤을 좋아한 끼 많은 청년은 아이돌 오디션에 통과해 부모님 몰래 연습생 생활을 시작했다. 데뷔를 코앞에 둔 어느 날, IMF로 인해 가장이 되고 나서 모든 걸 내려놨다. 공사장 일부터 시작해 해보지 않은 일이 없다.

 

셰프가 되기 전, 나는 전직 00이었다.

김희중(이하 김) 고등학교 때 음악을 시작해서 13년 정도 했어요. 대학교에 진학해 트럼펫을 전공하고 오케스트라 활동을 했지요. 여전히 음악을 좋아하지만 좋아하는 것과 직업의 세계는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생계유지가 어렵잖아요. 더욱이 클래식 음악가들은 말이죠. 오케스트라에서 트럼펫 연주자를 일 년에 서너 명 모집하는데 그때마다 경쟁률은 3000대 1이예요.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오케스트라 단원이 된다고 해도 사정이 크게 나아지지 않아요. 대학교 때 선생님이 학생들과 함께 파트타임을 하러 다니시던 모습은 정말 충격이었어요. 오랫동안 함께 해온 음악 생활을 접으려니 결단이 필요했고, 혹여나 미련이 남을까봐 완전히 손에서 내려놓았지요. 그 때 나이 스물 일곱이예요.

 

이산호(이하 이) 어렸을 때, 하트를 그리라고 하면 보통 하트를 그려 빨갛게 색칠하잖아요. 저는 색종이를 오려 붙여가며 하트를 만들었던 기억이 나요. 중학교 때까지는 예체능을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는데 고등학교때부터 음악이 좋아지기 시작했죠. 당시에는 R&B 음악과 랩이 유행이었는데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좋아했어요. 지금이야 오디션 프로그램이 방송에 나오고 많이 알려졌지만 그 때는 아이돌 오디션이라는 게 생소하던 시절이에요. 비트뮤직사의 오디션 공고를 보고 부모님 몰래 지원해 18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하게 됐고, 한남동에서 3년 간 연습생 생활을 했지요. 작곡가 유영진씨한테 트레이닝 받아 녹음과 앨범작업까지 마치고 막 활동을 시작하려던 참이었어요. 당시 함께 활동을 시작하던 그룹이 신화예요.

 

한석원(이하 한) 저는 대학에서 의상 디자인을 전공하다가 중퇴했어요. 어머니가 해외에서 원단을 수입해 유명브랜드와 의상실을 이어주는 일을 하셨기 때문에 언제나 집안 곳곳에는 원단이 수북이 쌓여 있었지요. 아줌마들이 가봉하고 치수 재는 모습을 늘 보고 자랐어요. 그런 영향 때문인지 유독 옷에 관심이 많아 고등학교 때 집안에 있는 옷은 다 꺼내 입어보기도 하고 서울에서 액세서리를 떼와 남포동에서 노점을 하며 돈도 벌었죠. 번돈으로 옷도 사고 나이트클럽에 가서 매일같이 놀았어요. 대학에 갈 생각도 없었죠. 그래서 고등학교 3학년때 대학 시험을 치는데 중간에 담 넘어 나와서 룩킹 포 굿바이라는 영화를 봤어요.

 

시간이 흘러 친구들을 만나니 과 미팅이 어떻고, 담당교수님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괜히 대학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원래는 패션으로 유명한 일본으로 공부하러 가고 싶었지만 부모님이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공부를 시작했어요. 이후 일본을 대표하는 유명 패션 학교인 문화 복장에 지원해 시험 보러 가게 됐어요.

 

 

왜? 요리를 선택하게 됐을까.

패션을 공부하러 떠난 일본인데 정작 문화 복장의 면접시험에서 낙방하고 말았어요. 1989년, 제가 살던 시대는 천편일률적인 교복과 삭발로 학교를 다닌 교복 세대였어요. 일본은 달랐죠. 어렸을 때부터 개성을 자유롭게 표출하고 살아온 그들에게 문화적인 충격을 받았어요. 나름 패션 감각을 자부하며 살았던 나인데 그들에게 감각적으로 뒤처져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어요. 좌절감이라는 고배를 마시고 미련 없이 꿈을 접었어요. 무모하게 과감하게. 그리고 일본에 있는 5년 동안 셰프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어요.

 

데뷔를 코앞에 남겨두고 갑자기 IMF가 찾아왔어요.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바람에 어머니와 지하 단칸방에서 살면서 가장 노릇을 하게 됐어요. 생계유지를 해야 하는 데 대학도 못가고 가수도 못됐으니 할 수 있는게 뭐가 있겠어요. 동네 공사장을 찾아다니며 막일을 시작했는데 그 땐 몸도 마음도 정말 힘들더라고요. 그러다가 전봇대에 ‘함바집 설거지 보조 구함’이라고 붙어있는 전단지를 보고 처음으로 주방에 들어가게 됐어요. 하루12시간씩 설거지만 했죠. 어깨 너머로 밥하는 아줌마들이 요리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는데 굉장한 기술로 보이더라고요.

똑같은 시간 일해도 돈도 많이 받고, 집에 계시는 어머니 밥도 해드릴 수 있겠구나 싶어 내가 저걸 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어요. 정말 열심히 일했는데 공사현장에서 간부 한분이 저를 눈여겨보시고 뭐가 하고 싶은지 물으시더라고요. 주저 없이 요리사가 되고 싶다고 했더니 아미가 호텔(현 임피리얼 팰리스 호텔)에서 근무할 수 있게 해주셨어요. 처음으로 갔던 호텔에서는 텃새가 심해서 여기에서 오래 일하려면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어머니가 어렵게 모아주신 학비로 학교에 들어갔고 지금의 워커힐 호텔에 실습생으로 인연을 맺어 올해 16년 째 있게 됐어요.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식당을 하셨어요. 곁눈질로 봐온 게 있어서인지 주방이 낯설지 않았지요. 처음에 요리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퓨전 레스토랑에 주방 보조로 들어가 설거지부터 시작했어요. 나중에는 칼 쓰는 것도 흥미가 생겨 요리를 한번 제대로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요. 호텔에 들어가려니 레스토랑 1년 경력으로는 받아주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다양한 식문화가 섞여있는 이민자의 나라, 호주로 요리공부를 하러 떠났죠. 초기 정착비만 들고 무작정. 한 달 치 방값, 한 학기 학비, 6개월 영어 학원 등록비, 그리고 주머니 속의 200달러가 전부였지요.


와! 딱 모범생 스타일. 저는 일본으로 떠나는 날 아침까지 나이트클럽에 있다가 빨간색 트렁크를 끌고 비행기를 탔을 정도로 노는 것을 참 좋아했어요. 만약 그 때로 다시 돌아가면 더 열심히 놀았을 겁니다.

 

모범생이라뇨. 호주에 도착했는데 영어를 전혀 할 줄 몰랐어요. 입국심사관의 질문에 답을 못해서 5시간 동안 공항에 묶여 있을 정도로요. 나중에 입학허가서가 생각이 나서 이민가방을 모두 뒤져 입학허가서를 보여 준 뒤 공항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지요. 영어연수 5개월 한 뒤 바로 학교 수업을 따라 가야하는데 휴.... 수업은 고사하고 과제가 뭔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죠. 출석률, 수업, 과제의 점수 비중이 70%나 차지해 졸업을 위해서는 밤을 새워서라도 수업을 따라가야 했어요.

일 년 정도는 하루 2시간만 자고 꼬박 수업에 매진했던 시기였지요. 그래도 외국에 나가보면 한국인이 손재주가 참 많다는 걸 알 수 있잖아요. 실습과목만큼은 A학점을 놓치지 않아 다행이었죠.


(오~ 여기서 박수 한번 나가야지요!)
(아니죠. 늦게야 정신 차린 거죠. 스물일곱에.)

 

두 분과 다르게 저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으니까요. 어느 날, 편찮으신 어머니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드리고 싶은데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 라면 포장지 뒷면에 나온 조리법대로 라면을 끓여드렸어요. 그 날, 어머니가 몹시 감격하시더라고요. 아... 예전에 가수 하겠다고 무슨 열정으로 뛰어들었지? 무대에 서면 사람들이 박수쳐주는 모습이 좋았던 거예요 나는. 그래서 본격적으로 요리에 뛰어들 수 있었어요. 음식으로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바로 그 날이요.

 

저도 처음부터 요리할 생각은 없었어요. 옷 사는 데 돈도 다 쓰고, 어쨌든 밥은 먹어야 하니까 식당에 파트타임으로 일하러 갔는데 사장님이 감각도 있고 손도 빠르니 주방에서 일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거죠. 그 땐 과감히 나의 길을 가겠노라 말했지만 자부해왔던 패션에 대한 감각도 뒤처지는 것 같고, 결정적으로 면접에서 낙방하고 나니 그제야 요리를 해야겠다! 주방에 들어 간 것이죠. 제가 있던 곳은 오픈 주방이었는데 고객들의 피드백이 바로 닿는 거예요. 패션보다 피드백이 빠른 요리에 점점 빠져들어 결국 조선호텔, 지금까지 오게 된 거예요.

 

 

무르익다, 호텔 셰프로 살아간다는 것
호텔 vs. 로컬, 호텔의 과잉공급, 미쉐린

여기 계신 분들은 셰프가 되기 전에도 좋아하는 일을 했지만 제일 좋은 직업은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것이라고 생각해요. 가끔은 주방에서 직원들이 저를 부르는 소리만 들어도 이유를 바로 알아챌 수 있어요. 그런 친구들은 여지없이 그만 두더라고요. 저는 그들을 붙잡지 않아요. 이 일이 맞지 않으면 몸도 마음도 지치기전에 빨리 그만 두는 게 맞아요. 정말 요리를 하고 싶은 사람이 요리를 해야지 월급쟁이로 살아간다면 재미없어요.

 

가끔 우리가 회사원인가? 요리사인가? 고민할 때가 있어요. 퇴근 시간만 바라보는 호텔 셰프는 회사원에 가까운 것 같아요. 로컬(호텔 밖에 있는 로드 숍)에서는 그런 게 없잖아요. 하루 14시간 씩 일하면서도 치열하죠. 참 안타까운 부분이에요.

 

선진국일수록 호텔이 약세고 로컬이 강세죠. 우리가 지금 그런 과정에 있다고 봐요. 말하자면 과도기이죠. 우리나라도 머지않아 로컬이 호텔을 역전할 날이 올 겁니다.

 

유럽은 어느 정도 그렇게 됐다고 봐야 해요. 그래도 규모면에서 호텔 레스토랑이 크지 않느냐? 그런 편견도 이제는 버려야 해요. 중국에서는 호텔보다 큰 고급 레스토랑도 많아지고 있어요. 한국은 시장이 한정돼 있는데 F&B 중심의 호텔이 아닌, 비즈니스호텔만 많아지고 있잖아요. 호텔 레스토랑의 정체성을 지켜가기 보다 트렌드에 이리저리 휩쓸리고 없애고 다시 짓고 합치고... 이제는 호텔의 레스토랑이 정체성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또 다른 시각 F&B 중심의 호텔이 많아지면 투숙하는 손님들 가운데 로컬 푸드를 찾으러 밖으로 나가는 경우도 줄어들 거예요. 호텔에 비즈니스성이 있는 거죠. 이익을 만들 수 있으니까. 한편으로는 호텔 밖 한식 레스토랑은 이런 호텔이 많이 생길수록 성장이 주춤하지 않을까요. 미쉐린의 영향도 있고, 로컬시장이 호텔시장보다 커지고 있는 것은 맞지만 손님들이 너무 한쪽으로 몰리잖아요. 그렇다보니 그 이외 다른 로컬 레스토랑이 살아남기 힘들고.

 

맞아요. 사실 미쉐린이 뭔지도 모르는 일반인이더 많아요. 셰프들 사이에서만 미쉐린을 알지 미쉐린이 한국에서 제대로 알려지려면 10년은 더 걸릴 것 같아요.

 

확실히 호텔 레스토랑을 이용하는 고객층도 젊어진 것 같아요. 10년 전에 스시조는 새로운 고객을 만들기 위해 리노베이션을 단행했어요. 최근에는 욜로족들이 생겨난다고 하지요. 놀랍게도 오마카세를 즐기거나 룸을 이용하는 젊은 커플 단위의 고객들이 많아졌어요. 특히나 주말에는.

 

지금 이곳에 한, 중, 일 아시아 요리를 하시는 분들이 모였는데요. 요즘 호텔에서는 동양식이 축소되는 분위기예요. 한식도 없어졌다가 미슐랭 때문에 다시 생겨났지만 여전히 매출을 끌어올리는 데 역부족이지 않나요? F&B의 볼륨을 줄이려는 분위기가 팽배한 것 같아요. 정통성 있는 레스토랑을 키울 생각은 않고 원가 절감을 위해 복합 레스토랑을 만들거나 외주화 하려는 모습이 안타깝지요. 특히 보고 체계가 길어 아이디어를 내도 실행되기까지는 너무 오랜시간이 걸리는 게 호텔의 레스토랑이 가지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예요. 그렇다보니 트렌드가 떨어질 즈음에서야 시작하게 되고 늘 뒤처질 수밖에요.

 

저도 원가를 생각해야하는 자리에 있어서 경영자 마인드를 이해해요. 하지만 셰프 마인드로 볼 때에는 너무 한 면만 보는 것 같은 아쉬움이 있지요. 제가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볼게요. 호텔에서 해외 출장을 자주 보내 주나요? 저는 일 년에 여섯 번 일곱 번정도 출장을 가는 편인데 보통 1인당 400~500만 원정도 들어요. 그러면 5000만 원 정도의 매상을 올려야 하는데 오너 입장에서 그런 결정이 쉬운 건 아니죠. 그래서 경영진의 마인드가 중요해요. 물론 이건 전체적인 호텔 업계의 문제이지만. 제가 출장 가면 로컬 셰프들을 많이 보게 되요. 그들은 요리 장르를 막론하고 전국 각지는 물론 전세계를 많이 돌아다니죠. 그래서 트렌드가 빨리 파악되는 거예요. 호텔도 그렇게 해야 로컬을 이길 수 있어요. 요리하는 사람에게 고집이 없으면 발전이 없어요.

 

호텔은 규모도 크고 절차도 복잡해서 실행에 어려움이 많은 건 사실이에요. 미쉐린으로 인해 한식이 붐업되자 많은 호텔에서 한식당을 오픈했지만 이미 로컬에 많이 늦었지요.

 

더 이상 미쉐린에 연연하기보다 호텔 레스토랑의 정체성 찾는 일에 힘을 쏟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호주에서 13년간 근무하고 한국에서 요리를 시작한지 3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두 분 말씀 들어보니까 한국은 호주와 환경이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외국에서는 한국만큼 한식 효과가 크지 않아요. 한식은 한국에서만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요. 오히려 외국 호텔에서는 양식, 중식, 일식은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지만 한식은 그렇지 않죠. 제가 호주에서 서양 요리를 공부하면서 한식 셰프가 된 이유기도 한데, 어느 날 호텔에서 셰프가 제게 한국 요리를 해보라고 했는데 못했어요. “왜 너희나라 음식인데 못하니?” 라는 말에 모국의 요리도 모르고 다른나라 요리를 한다는 게 갑자기 창피하더라고요. 그래서 한국에 돌아와 한식을 공부하는 셰프가 됐어요.

 

한식세계화의 발목을 잡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계파거든요. 한식을 누구한테 배웠는지가 중요하다는 말이에요.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고 봐요. 김 셰프님처럼 외국에서 한식을 시작하게 됐다면 오히려 한식셰프로서 펼칠 수 있는 스펙트럼이 다양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셰프가 되기 이전의 경험이 요리를 만드는데 어떻게 영감을 줄까.

돌솥비빔밥이 손님상에 놓였을 때, 어떤 감각이 제일 먼저 와 닿을까요? 바로 지글거리는 소리죠. 저는 음식을 만들 때 밸런스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음식의 색, 맛, 영양소. 돌솥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밥알과 닿아 내는 맛있는 소리를 주방에서는 들었는데 서비스 되는 과정에서 없어질 수 있어요. 이 모든 안정감이 흐트러지면 손님이 불편함을 느낄 확률이 크죠. 음악에서 음은 한 음씩 정확하고 깔끔하게 떨어져야 듣기 좋은 소리가 되죠. 음식에서도 마찬가지예요. 플레이팅할 때 얼룩이나 실수가 있으면 안돼요. 그래서 음식이 서비스되기 전에는 항상 확인해야 되고 예민해지는 것 같아요.

 

공사장 뿐 아니라 중국집 배달원, 신문배달 할 것 없이 어렸을 때부터 안 해본 일이 없었어요. 그 때 가졌던 절실함이 요리를 시작한 계기가 됐고, 요리를 만들 때마다 고객들이 이 요리에서 어떤 느낌을 받을까를 늘 생각하게 되죠. 제가 끓여준 라면에 어머니가 눈물을 보이셨던 그 때의 감동처럼요. 4년 전에 힐링 셰프라는 연구모임을 만들었고, 지금은 회원 수가 2만 명을 넘는 인지도 있는 모임을 운영하고 있어요. 아티스트와 셰프의 만남이라는 모티브로 공연도 했는데 국악팀 ‘들소리’와 6개월 간 연습하며 호흡을 맞췄어요. 음악 연주자들의 음악이 시작되면 요리도 시작되는 거죠.

 

부럽네요. 역시 젊은 셰프군요. 요리와 멋진 콜라보도 시도해보고.

 

요리는 모든 장르와 콜라보가 가능해요. 기회가 되면 여기 두 분도 모시고 싶어요.

 

젊은 시절 불태웠던 패션에 대한 관심은 요리할때 많은 도움이 되고 있어요. 일본요리는 눈으로 먹는 요리라고 할 정도로 맛만큼이나 플레이팅이 상당히 중요하죠. 그래서 기물의 선정에 있어서 세심한 감각을 필요로 해요. 제 버킷 리스트는 영어, 음악, 도자기 굽기 등인데 이 모든 게 요리와 관련이 돼 있다고 봐요. 요리는 예술 하던 사람들이 더 잘하는 것 같아요. 반대로 요리하다가 의외의 면을 보게 되면 더 신선하게 느껴지지 않겠어요?

 

언제 내가 요리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까.

늘. 매 순간 잘했다고 생각해요. 더 잘하는 게 있었으면 여기 있지 않았겠죠. 집에서는 시들하다가도 회사에 오면 정신이 바짝 들 정도로 살아나니까요.

 

손님들의 피드백이 좋을 때, 가족들이 음식을 맛있게 먹어줄 때.

 

늦게 시작한 사람의 열정이 더 높은 법이죠.

 

16~17시간 근무해도 너무 재미있어서 힘든 줄 모를 때가 있어요.

 

리듬 붙으면 재미있죠. 너무 재미있어 일하는 게. 빨리 해가 뜨기만을 기다린 적도 있다니까요.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관리자가 될수록 힘들어 지는 것 같아요. 요리 이외에 생각해야 할 것들이 많아지죠. 제한을 스스로 만들어 가니까.

 

외국에서는 요리사라는 직업에 매우 좋은 이미지가 있어요. 우리나라에서만 저평가 되어 있었죠. 그래서 저는 3년 전쯤 한국에서 셰프 열풍이 불었을때 많이 놀랐어요. 지금이 중요한 시점이 되겠다고 생각했죠. 그 때 요리하길 잘 했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있구나하고 느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요리사는 힘든 직업인지라 하루에도 몇 번씩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건 어쩔 수 없어요.

 

(왼쪽부터) 김희중 셰프, 한석원 셰프, 이산호 셰프(왼쪽부터) 김희중 셰프, 한석원 셰프, 이산호 셰프

 

내 인생의 특별한 장소는 어디?

일본 코엔지의 어느 허름한 건물. 일본에서 일하던 시절, 한 달에 3만 엔(우리 돈으로 30만 원)씩 내고 지내던 자취방이에요. 거기서 인생을 새롭게 시작했잖아요. 스물다섯 살 이후의 인생을 살게 한 결단을 내렸던 그 방이 그립네요. 제 처지를 대변할 수 있는.

 

호주. 당시에는 문화 충격이었지만, 요리의 눈을 뜨게 한 곳이죠. 내가 무엇을 시작해야할지 스스로 답을 찾은 곳. 한국과는 다른 자유분방함 속에서 스트레스 없이 마음껏 끼를 발산할 수 있었죠. 저는 지금의 후배들이 그렇게 재미있게 일했으면 좋겠어요.

 

강원도의 부모님 집. 지금은 일이 잘 풀려서 강원도에서 집을 짓고 살고 계세요. 어려웠던 시절에 어머니와 단 둘이 밥을 먹을 때가 많았는데, 지금도 힘들때면 찾아가곤 해요. 어머니와 같이 식사하며 마음의 평안 얻을 수 있는 곳이죠. 넌 아직 멀었다는 어머니의 질타를 받으며.. 제일 좋아하는 장소예요.

 

요리할 때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 컴플레인에 대해

재료가 중요해요. 재료가 좋으면 요리에 덧칠을 하지 않아도 맛이 나게 마련이죠. 내가 맛있으면 손님도 맛있거든요. 요리사의 맛은 식재료 품질을 가르는 기준이기도 하지만 고객에게 서비스 되는 음식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맛을 잘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해요. 그렇지 않으면 컴플레인으로 이어지죠.

 

호주와 비교했을 때 한국에서는 유독 컴플레인이 많아요. 요즘 건강을 생각해 맛을 싱겁게 맞춰도 맛의 기준에 있어서는 개인차가 있기 마련이잖아요. 그럼 꼭 주방장을 나오라고 하죠.(모두 공감) 호주에서는 표현에 인색하지 않아요. 음식이 맛있으면 직접 셰프를 찾아가 악수하고 고맙다고 인사하지요. 한국에서는 고마움 보다 뭔가를 성취하기 위해 호텔 레스토랑을 찾는 손님이 많은 것 같아요.

 

한국에서 한식이 어려운 이유인 것 같아요. 우리는 모두 한식을 먹고 살았기 때문에 한식에 대해 입맛이 예민할 수밖에 없어요.

 

식문화가 정착되기 위한 과도기 인거죠. 이제는 셰프들의 태도도 바뀌어야 한다고 봐요. 좀 더 전문성을 갖고 고객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어야죠. 후배들이 설 자리를 위해서라도 지금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