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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 & Cafe,Bar

호텔앤레스토랑 - “도전하는 자에게 기회가 온다”_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나스,임호택 셰프

 

그 남자. 한 호텔, 동일 업장에서 16년 외길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다. 수십 년 동안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퍼 올린 우물에서는 한 여름 더위도, 극심한 가뭄에도 거뜬한 맑고 시원한 생수가 솟았다. 셰프로서 살아 온 인생에 즐거움과 성취감이 더 많지만 마음 한 편에 쌓아 둔 섭섭함도, 고뇌도, 한숨도 비가 돼 내렸다. 말단으로 입사해 명성 높은 프렌치 레스토랑 테이블 34에서 최초의 한국인인 헤드 셰프라는 타이틀을 얻기까지 그의 열정은 멈추지 않았다. 수첩과 펜, 카메라를 손에 쥐고 온 주방을 누비고 다니던 초심의 순수함을 그대로 지닌 이달의 셰프, 임호택 셰프다. 

 

올 해 1월, 테이블 34 최초의 한국인 주방장이 되셨네요. 축하드립니다. 테이블 34는 프렌치 레스토랑으로 국내에서 손꼽히는 곳인 만큼 줄곧 프렌치 주방장이 키를 쥐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인사에 의미가 깊어요. 게다가 오픈 멤버시라고요?
감사합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주변의 도움이 없었다면 혼자서 오기 힘들었을 거예요. 우선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요. 저는 2002년에 입사했어요. 당시에 정통 프렌치레스토랑 바론즈가 리노베이션을 거쳐 테이블 34로 재탄생하면서 인원 충원이 있었기 때문에 말단으로 입사하게 됐지요. 제 포지션으로는 요리 근처에 가보지도 못하고 식재료를 운반하면서 선배들이 하는 것을 어깨 너머로 보곤 했어요. 그랬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6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네요. 이곳은 제 인생과도 같아 애정과 손길이 머물지 않은 곳이 없어요. 제가 부산에서 공업고등학교 용접과를 졸업했거든요. 그래서 머릿속에 주방에서 불필요한 동선과 기물 배치에 대한 밑그림이 그려져요. 실제로 많은 부분을 개선시켰죠. 요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서 처음으로 시작했어요. 원래는 자대 배치를 전공과 연관 있는 총기수리병으로 받았는데 어느 순간 취사병으로 바뀌었더라고요. 요리 교육도 받아본 적 없는 제가 생전 처음으로 주방에 섰어요.    

 

임호택 셰프의 인생요리 '부야베스'임호택 셰프의 인생요리 '부야베스'

 

그렇다면 군대에서 취사병이 되면서 인생이 바뀌셨네요. 요리를 하게 될 운명이었나 봐요.
맞아요. 저는 특수용접이 전공이에요. 공고에서 졸업할 때 취업 실습을 나가잖아요. 방위산업체에 가서 용접 일을 해보기도 하고 지게차도 한 달 만에 마스터했어요. 보기에는 쉬워도 감각적으로 각을 조절해 움직이는 게 쉽지 않거든요. 생각해보면 손으로 하는 일이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취사병이 됐을 때도 재료를 칼로 썰고 음식을 만드는 것에 흥미를 느끼게 됐나 봐요. 말년 휴가를 반납할 정도로 재미에 푹 빠졌으니까요.

 

앞서 이 자리에 오기까지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고 하셨는데 그중에 특별한 인연이 있다면 소개해주시겠어요?
아 그럼요. 있죠. 제가 요리를 계속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제대하자마자 호프집에 들어가서 일했어요. 어느 날 문득 내가 과일 자르고 오징어 구우려고 요리사가 되려고 했던 게 아닌데 하는 회의감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해운대 뒷골목에 있는 일반 호텔에 들어가게 됐어요. 뷔페 행사 위주로 운영되는 곳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대학에서 교수님이 찾아와 저에게 야간대학 입학을 권유했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를 하게 됐어요. 그 때 만난 동기 중에 베이커리 사업을 하시던 형님이 계셨는데 그 분이 바로 제 인생의 길잡이가 되어주신 분이세요. 황수근 선생님.

 

“잊지 못할 내 인생의 트레이너”

 

인생의 길잡이라는 말이 묵직하게 들리는데 어떤 사연이 있나요?
중요한 순간마다 조언을 많이 해주셨어요. 그분이 어느 날 저에게 크게 되려면 지금 회사를 그만 두고 영어공부를 하라고 하시더라고요. 하루 8시간짜리 커리큘럼으로 된 국비 지원 교육이었는데 초반에 40명이 입학해 1주일이 지나니 반이 줄었어요. 알파벳도 제대로 모르는 데 귀에 들리는 게 있을 리 없잖아요. 그 와중에 반장이 돼서 열심히 공부했어요. 졸업을 하자 그 분은 제가 서울의 특급호텔에 지원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어요. 이력서, 면접 요령, 심지어 면접을 보기 위해 떠나기 전날 부산역 앞에까지 배웅해주셨어요. 변변한 정장도 없던 저를 위해 자신의 말끔한 정장 한 벌을 선뜻 안겨주시며 봉투를 건네시더라고요. 무궁화 기차를 타고 올라가는 중에 얼마쯤 지났을까. 봉투를 살짝 열어보니 면접을 위한 조언이 담긴 따뜻한 편지와 30만 원이 들어있더라고요. 기차 안에서 뭉클한 마음에 눈물이 울컥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어요. 당시에 그 돈 30만 원은 제가 숙식을 해결하고도 남을 만큼 많은 돈이었고 지금까지도 그 돈의 가치는 따질 수 없을 정도이지요.


서류 심사를 통과해 면접을 보게 된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최종 5명 중에 2명이 합격하게 됐는데 만약 영어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떨어졌을 겁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그 분의 코칭이 없었다면 지금 제가 이곳에 설 수 있었을까요?
저는 호텔에서 제일 막내, 쿡 헬퍼로 일을 시작했어요. 요리는 해보지도 못하고 식재료 배달이나 허드렛일을 하며 어깨 너머로 익혔죠. 그것마저도 너무 신기해 퇴근 후면 온 주방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게 낙이였어요. 그동안 책에서나 보던 식재료와 요리를 냉동이 아닌 실물로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2002년의 어느 날, 그분은 홈페이지 도메인 주소를 제게 남겨주시고는 이제부터 홀로서기를 해야한다고 하셨죠.


“호택 씨, 이제부터는 홀로서기를 해야 합니다.

앞일을 생각해서 컴퓨터는 반드시 알아둬야 해요.

멈추지 말고 항상 배움의 끈을 놓지 말고 도전하세요.

이것이 이제 내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이 될 겁니다.”


이 말을 남기시고는 연락을 모두 끊으셨어요. 당시만 해도 요리 홈페이지가 생소하던 때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빈 공간을 하나 둘 채워갔죠. 마치 곳간에 곡식을 채우는 기분이랄까. 홈페이지에 요리 사진을 올리기 위해 노트북과 디지털 카메라를 구입하고 전 업장을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어요. 지금이야 핸드폰으로 요리사진을 찍지만 주방에서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건 선배들이 업장에 붙여놓고 쓰기 위해서 찍는 게 전부였던 시절이었어요. 그런데 주방 막내가 디카를 들고 찍어대니 뒤통수를 얻어맞기도 여러 번이었죠. 레스토랑 주방은 물론 채소실, 생선실, 훈제실, 부처, 가드망제 할 것 없이 온 주방을 돌아다니며 사진에 담았어요. 사진을 찍어오면 홈페이지에 올리기 위해 이 사진이 무슨 사진인지 알아야 했어요. 선배들에게 묻기도 하지만 좀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 나머지는 제 몫인 것이에요. 책, 인터넷 다 뒤져가며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식재료부터 요리까지 파고들기 시작했죠. 그렇게 채워진 홈페이지는 말하자면 저의 지식창고였어요. 지금은 홈페이지가 없어졌지만, 공들여 모아둔 자료가 아까운 게 아니라 그 때 사진을 찍고 공부한 것들이 성장을 위한 밑거름이 됐다는 사실이에요. 나중에 알고 보니 도메인을 사는 것이었더라고요. 연락을 끊으신 이후에도 저를 위해 그 도메인 비용까지 지불하셨던 거죠. 저는 그것도 모르고...

 

 

지금도 그분과 연락이 닿지 않나요? 왜 연락을 끊으셨을까요?
해마다 스승의 날이면 잊지 않고 전화와 문자를 보내곤 했어요. 그리고 3년 전 쯤에야 마침내 연락이 닿았어요. 왜 이제야 전화를 받으시냐고 하면서 그 때 펑펑 울었죠. 그동안 많이 아프셨대요. 제 전화를 받지 않았지만 그래도 해마다 전화해줘서 고맙다는 말에 하염없이 눈물만 나오더라고요. 그 길로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두 손 가득 선물을 사들고 아내와 함께 부산을 찾았어요. 물론 지금까지도 계속 연락드리고 있지요.  
    
굉장한 애정을 쏟으셨네요. 그 분을 만나면 저도 묻고 싶은 게 생겼어요. 셰프님을 왜 그렇게까지 아끼신 건지. 아마도 이런 셰프님의 됨됨이를 일찍부터 아신 걸 꺼에요. 

 

“도전하는 자에게 기회가 온다.”  

 

 

입사한지 만 16년, 오직 한 호텔에서만 근무해 오픈 멤버에서 헤드 셰프가 되기까지 순탄하지만은 않았을 것 같은데요.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왜 없었겠어요.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 했는데 승진 명단에서 제외될 때면 좌절감에 빠질 때도 있었어요. 2007년에 블랙박스요리대회(제8회 MLA Black box Culinary Challenge Korea)라고 호주식육공사에서 주최한 글로벌 요리대회에 출전해 저희 팀이 우승한 적이 있어요. 이 대회는 말하자면, 세계대회로 가는 출전권을 획득하기 위한 국가대표 국내 예선전인 셈이죠. 그리고 이듬해 두바이에서 개최된 세계대회, 제 4회 MLA Black box Global Grand Final Madinat Jumeirah, Dubai에서 우승하며 저희 팀 전체가 금의환향해 돌아왔어요. 공항에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직원식당에 블랙박스 우승 특식이 나올 정도였지요. 그런데 팀원들은 고사하고 팀장님조차 승진명단에 오르지 못했어요.

 

그 때 모두 호텔을 나왔어요. 동료들은 다른 호텔로 이직해 과장까지 달더라고요. 저는 그 때 레스토랑 헤드 셰프가 새로 부임했기에 더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해 남았는데 이렇게 계속 정체해도 되는지에 대한 고민도 했었어요. F&B 디렉터를 만나 솔직한 심정을 밝히기도 했고요. 그 분 뿐만 아니라 호텔에 있으면서 만나는 셰프마다 제게 좋은 평가를 해줬고 후에는 그들의 도움으로 모 특급호텔 수셰프 자리에 추천받게 됐는데 10년 경력에 메뉴까지 짜는 ‘서드 쿡’이라니 제 포지션에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죠. 결국 너무 많은 승급 단계를 뛰어 넘어야 했기에 조건을 맞추지 못하고 채용이 안됐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잘 된 일이지 싶어요. 아마도 저의 처음이자 끝은 바로 이곳이 되지 않을까요? 제 젊음과 열정을 다 바친 곳이니까요.   
 
그렇죠. 사실 호텔에 실력 있는 셰프들이 많은데 어필하지 못해 묻히는 경우가 많아 안타까워요. 좋은 인적자원을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셰프님처럼 적극적으로 자신을 어필하는 것도 필요한 것 같아요. 

 

“짠 맛은 짜게! 단 맛은 달게!”

 

 

셰프님이 만들어 보이고 싶은 프랑스 요리는 어떤 것일까 궁금한데요?
예전에 함께 일했던 프렌치 셰프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한식당에서 김치가 나가는데 맵다고 컴플레인 하더냐?” 제가 만들고 싶은 요리는 바로 그거예요. 부야베스라고 해산물의 짠기가 짭조름하게 느껴지는 요리가 있는데 짠 요리는 짜게, 신 요리에서는 신맛이 느껴져야 하거든요. 그 요리에서만 느낄 수 있는 본질을 살려야 해요. 이도 저도 아닌 요리가 아니라. 그런 면에서 셰프라면 철학과 고집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아직 더 배워야 하는 단계죠. 또 하나는 제철 식재료입니다. 테이블 34에서는 계절성에 맞는 식재료는 반드시 사용하고 있어요. 가령 ‘라따뚜이’라고 하는 프로방스 지방의 유명한 채소 스튜가 있는데, 각종 허브, 토마토, 가지, 호박 등 계절 채소를 넣어 만들죠. 제철에 나는 식재료는 그 계절에 먹어야 최적의 상태와 맛을 낼 수 있으니까요. 마지막으로 프랑스 현지의 파인다이닝에서 선보이는 메뉴의 다양성을 소개하고 싶어요. 한국인은 유독 그릴에 구운 스테이크를 좋아하지만 사실 프랑스에 가면 육류 메뉴만도 치킨, 토끼, 비둘기, 어린 양 등 재료도 조리법도 무척 다양해요. 특이 식재료도 많고요. 이런 재료의 다양성을 한국의 고객들이 즐길 수 있도록 프렌치 요리의 다양한 방법을 구현해볼 생각입니다.

 

철학과 고집이 있어야 한다는 대목이 와 닿네요. 참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요.
저희 호텔 만해도 규모가 꽤 크다보니 고객의 코멘트나 만족도를 수집하는 채널이 다양해졌어요. 물론 호평도 불평도 있지요. 여기에 있어서 중심을 잃지 않는 게 필요해요. 안 좋은 것은 변화를 줘야 하지만 셰프로서 가진 확신에 있어서는 그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앞서 말했듯이 요리의 본질을 지키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봐요. 프렌치의 디테일이 느껴질 수 있을 정도의 정성은 반드시 필요하고 판단했을 때, 플레이팅이 과하다고 평가할 수만은 없지요. 파인다이닝에서 좋은 식재료도 중요하지만 음식의 터치도 그만큼 중요하거든요. 파인다이닝을 찾는 고객들도 매너를 지켜주면 좋겠어요. 저는 고객들이 원하면 무조건 구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스테이크의 굽는 정도도 스탠다드가 어떻든지, 고객의 입맛이 기준이에요. 하지만 프렌치 레스토랑에 와서 밥과 김치를 찾는 것은 다르죠. 음식에 대한, 그 음식을 만드는 사람에 대한 매너가 아니라고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