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에도 어김없이 시상식으로 스크린이 뜨거웠는데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으로 그 열기가 식지도 않고 아카데미 시상식에 모아졌다. 영화인의 축제, 아카데미만큼이나 우리나라에도 의미있는 셰프들의 시상식이 열린다면 아마도 신인상, 인기상 명단에 이영라 셰프가 이름을 올리지 않을까. 혜성처럼 등장해 많은 관심을 모은 이영라 셰프에게는 변호사라는 독특한 이력이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서른을 훌쩍 넘어 요리계에 발을 들였지만 어설픈 타이틀이 아닌 확실한 타이틀을 거머쥐기 위해 곱절의 피나는 노력을 쏟아 부었고 요리는 이셰프에게 공기처럼 호흡으로 남았다.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고 하지 않나. 꼭 이 순간 떠오르는 사람이 이영라 셰프다. 전직 변호사라는 꼬리표를 떼고 현직 셰프로서 실력을 당당히 인정받고 싶은 인생 제 2의 챕터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Q. 수없이 이 질문을 들었겠지만 거기에 한번 더 얹을게요. 요리하는 변호사가 아닌 '셰프'를 선택한 이유가 뭔가요?
같은 질문에 반복해 답을 하다 보니, ‘애당초 나의 꿈은 요리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것을 깨닫기까지 오래 걸렸을 뿐이죠. 사실 어렸을 때에는 이 일을 ‘좋아하는 일’ 정도로만 여겼어요. 유명한 셰프는 아니더라도 요리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거든요.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유일한 창구는 바로 요리였어요. 학창시절에는 BBC 요리 채널의 쿠킹 쇼를 즐겨봤고 미국에서 공부할 때도 파머스 마켓에서 보는 다양한 맛과, 향, 여러 색감의 식재료를 마주할 때 신선한 영감을 얻는 기분이었지요. 외식을 할 때도 가급적 오픈된 주방 근처에 앉으려고 했어요. 제 눈에는 주방에서의 살아있는 움직임이 군무, 오케스트라처럼 보여요. 주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역동적인 에너지를 저도 함께 느끼고 싶었거든요. 요리는 늘 제 삶의 활력소였지요.
Q. 주위에서는 이 선택을 무모하다 했을 텐데요.
법을 공부할 때는 법학자가 꿈이었어요. 대학원에 진학해 석사까지 마치고 판례법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가서 로스쿨을 졸업해 변호사가 됐지요. 원 없이 공부도 했고, 회사 법무팀에도 있어봤지만 아침에 일어나 출근이 기다려지고 일하는 하루하루가 행복하단 생각이 드는 건 요리하는 지금이에요. 우리나라 헌법 제 10조에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돼 있어요. 대학교 1학년 때 이 법조항에 꽂혀 헌법을 연구하는 학자가 되고 싶었을 정도로 강렬한 느낌을 받았어요. 우리는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행복할 권리를 찾아 지금 이곳에서 요리를 하고 있는 것이고요.
Q. 서른 둘에 주방 막내 생활은 쉽게 선택할 수 있는게 아닌 것 같아요.
어느 정도 커리어를 다져나갈 서른 초반에 전혀 다른 분야로 이직해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게 모험이라고 하지만 저는 다른 사람들보다 늦었으니 지금이라도 빨리 시작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어요. 누군가는 저에게 어떻게 그런 용기 있는 선택을 했느냐 묻지만 되돌아보면 고민할 새도 없이 이 선택이 너무 당연했기 때문에 대단한 용기도, 실패 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없었어요. 이것저것 계산하고 따지고 들었다면 이 일을 계속할 수 없었겠죠. 저는 그저 이 일을 매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지만 생각했어요. 타이밍은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뭔지 그것을 찾아내는 게 중요하죠. 사실 저에게 질문을 던지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자기 안에 답을 갖고 있어요. 단지 저를 통해 그것을 확인하는 것 같아요.
Q. 요리사라는 직업에 대한 생각은요?
일전에 한 아티스트 분이 오셔서 묻더라고요. 매일 똑같은 요리를 만드는 게 지겹지 않느냐고요. 하지만 내가 만나는 고객이 매일 다른데 그게 어떻게 똑같은 요리가 될 수 있는지 반문했어요. 한 요리에 사용되는 재료만 해도 지방량, 산도, 텍스쳐, 수분량 등 어제 오늘의 상태가 다 달라요. 요리사는 매일 같이 달라지는 식재료를 체크하고 고객에게 최상의 질의 요리를 선보이는 사람인거죠. 한편으로는 사회적인 통념을 떠나 저는 ‘사’자 중 최고의 직업이 요리사라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이 선망하는 ‘사’자 돌림 직업군은 억울하거나 아픈 사람들을 만나지만 요리사는 달라요. 사람들은 기념일이나 상견례 등 잘보이고 싶거나 설레고 행복한 순간을 기대하며 레스토랑을 찾죠. 요리사는 그들의 행복한 시간을 보조해주고 완성시키는 일을 하잖아요. 게다가 고객의 즉각적인 반응을 얻으니 저처럼 단순한 사람에게 매력적인 포인트가 아닐 수 없어요.
Q. 셰프 이영라가 마주하는 추억이나 기억 같은 게 있나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가 매일같이 새벽시장에서 신선한 재료들을 사오셨고 그 재료를 온가족이 함께 다듬어 엄마가 맛있게 요리해주시면 온 식구가 한상에 둘러앉아 식사하곤 했어요. 제 삶에서 다섯 식구가 끼니 해먹던 장면은 공기처럼 당연한 것이었죠. 그런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음식, 재료 하나에 대한 저의 애착도 남다르지 않았나 생각해요.
Q. 이 일을 하는 셰프님에게서 행복한 기운이 넘쳐나는데, 사실 겉보기와는 달리 힘든 일이잖아요.
지근에서 육아하는 것을 지켜보니 아이가 주는 행복과 기쁨이 51%이고 아이로 인해 힘든 게 49%라고 하더라고요. 그 2%차이 때문에 자신을 희생해 아이를 키운다는 말을 들었어요. 모든 직업이 이와 같지 않을까요? 이 일이 유독 힘든 게 아니라 나에게 주는 성취감과 기쁨이 힘듦과 종잇장 차이로 유지되기 때문에 지속할 수 있는 거예요. 큰 차이가 아닌 단 2% 차이로 말이죠. 지금껏 딱 한 번 내가 이 일을 오래할 수 있을까? 생각했던 적이 있어요. 주방 막내로 있을 때 공부만 하던 사람이 꼬박 12시간을 서있으려니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러던 중 마지막 코스의 접시가 들어오는데 소스까지 싹 비워진 접시를 닦으면서 모든 피로가 풀리면서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Q. 타인을 위한 멘토 역할을 하고 있지만 셰프님의 멘토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제가 프랑스 요리를 배우기 시작한 곳은 르 꼬르동 블루 숙명 아카데미인데 10년간 이곳의 조리장을 맡은 로랑 벨트와즈 셰프님이 셰프로서의 기본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주셨어요. 남들보다 시작이 늦은 저에게 용기, 기본, 방향성을 제시해 주셨죠. 지금도 그분이 가르쳐준 기본 원칙을 되새김하고 요리를 개발해요. 그래서 저처럼 요리를 늦게 시작한 분들에게 똑같이 조언하고 싶어요. 셰프에게 나이프 스킬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셰프의 역량을 가늠하는 절대적인 척도는 아니에요. 요즘 주방에 좋은 도구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데요. 집착을 버리고 그보다는 합리적인 작업에 더 집중하는 게 중요합니다. 얼마나 창의적이고 효율적으로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나머지 자투리는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를 고민하고 연구하는 것이죠.
Q. 그렇게 강조되는 프랑스 요리의 기본은 뭔가요?
여전히 가슴에 새기고 있는 말은 “랍스터, 한우++ 등 최고의 식재료를 가지고 맛없게 요리하는 것은 셰프가 아니다. 가장 흔한 식재료로 최고의 요리를 만들 수 있는 게 셰프.”라고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프랑스 요리에 흔히 사용되는 닭고기, 감자로 연습해요. 재료의 물성을 이해해고 완벽한 요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죠. 프랑스 요리의 3대 요소를 버터, 버터, 버터라고 해요. 그만큼 버터의 사용이 중요하기 때문에 버터를 잘 다루는 법을 늘 연구하고 고민하지요.
Q. 셰프로서 유용하게 쓰이는 장점은 뭔가요?
저는 요리사로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지구력만큼은 자신있어요. 재미있는 일을 지구력 있게 하면 효과는 더욱 커지겠죠. 물리적인 시간의 총량을 따지면 저는 지난 8년을 16년처럼 보냈어요. 셰프가 되기 위한 지름길은 없어요.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으니 공백을 채울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했고 그 시간을 빈틈없이 채우기 위해 주말도 없이 곱절의 시간을 연마하며 일했어요.
Q. 와인 좋아하시죠? 특히 이곳 더 플라자 호텔 내 업장은 한국와인의 성지가 되기 위한 포부를 밝힌 곳인데 요리할 때 와인과의 궁합은 어떻게 매칭 하는지도 궁금해요.
와인 너무 좋아하죠. 프랑스 요리에서 와인은 음식과도 같아요. 한식에 동치미가 있어서 음식 중간 중간에 입을 촉촉하게 해주는 것처럼 와인도 음식과 곁들여져서 맛을 살려주고 느끼함을 덜어주는 하나의 장치예요. 그래서 음식에 와인을 잘 사용하는 것이 요리사에게 정말 중요해요. 포도가 자라온 떼루아, 빈티지 등에 따라 와인의 캐릭터도 다 달라요. 한마디로 와인은 살아있는 생명체라고 할 수 있죠. 한국와인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잠재력만큼은 높이 평가해요. 저는 제철 식재료를 와인과 매칭하는 작업을 좋아하는데 이 토양에서 자란 식재료는 마찬가지로 같은 곳에 뿌리내린 포도로 생산된 와인과 매칭될 수밖에 없어요. 실제로 한국와인과 한국 제철 식재료의 특징을 살린 요리를 페어링 했을 때 반응이 좋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오미자 스파클링 와인 결을 좋아해요. 공교롭게도 이름처럼 제가 하는 모든 요리와 결이 맞기 때문인데, 특히 시그니처인 오리다리 요리와 매칭 했을 때 오리의 수용성 지방을 이 와인이 잘 살려내더라고요.
Q. 추구하는 요리는요?
한국의 제철 식재료에 프렌치 테크닉을 더한 요리에요. 최근에는 구절판을 양식의 형태로 선보이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특히나 요리에 산도를 적절히 쓰면 한입 한입이 재밌기 때문에 킥포인트로 즐겨 사용해요. 서양식에서는 음식이 갖고 있는 산도가 없기 때문에 와인이 그것을 대신 채워주는 역할을 하지만 우리 음식은 산도가 많아요. 김치, 장아찌와 같은 발효음식이나 초무침 같은 요리도 즐기죠. 이러한 이유로 한식에는 단맛을 내는 전통주가 많지 않았나 추측하기도 하고요.
Q. 셰프님에게 마지막 식사가 허락된다면 어떤 식탁이 그려질까요?
건강한 목초지에서 자란 소가 주는 최고급 버터에 잘 구워진 빵이요. 색소나 어떠한 첨가제도 들어가지 않고 단지 좋은 소금만 넣어 만든 버터는 그 자체만으로도 최고의 음식이죠.
Q. 지금까지 셰프 이영라를 소개하는 시간이었다면 앞으로 남은 시간은 셰프로서의 본질에 더 가까워지기 위한 시간일 것 같아요.
마침 제가 하고 있는 고민이에요. 서른 둘에 요리를 시작해 채 단시간에 총괄셰프 자리에서 주목을 받게 됐어요. 하지만 제 안에 여전히 막내 요리사 마인드도 있거든요. 아직도 배우고 싶은 게 많은 데 큰 책임을 지고 있는 동시에 요리사 이영라를 각인시켜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어요. 주목은 받았는데 중요한 건 그 다음이니까요. 초심을 잃지 않고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총괄 셰프로 있는 지금도 일년에 한번 한 달간 다른 업장에서 스타쥬로 일하고 있어요. 지난해에는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인 르 도와양과 피에르 상에 들어가 막내로 일했고 올해는 도쿄에 다녀오려고 계획 중이에요.
Q. 프랑스까지 가서 분명 배우고자했던 목표가 있었을텐데요.
시스템이요. 전세계에 레스토랑을 갖고 있는 유명 셰프들은 한 곳에 머물지 않고도 동일한 퀄리티를 유지하지요. 셰프가 없는데도 퀄리티가 유지될 수 있는 원동력이 뭔지 그 시스템을 배우고 싶었어요. 피에르 상 같은 경우에도 같은 라인에서 3개의 콘셉트를 선보이는데 하나같이 완성도가 높은 요리가 나와요. 이런 레스토랑은 미쉐린의 별이 문제가 아니라 고객들의 만족도가 정말 높아요. 그 비결이 뭔지 궁금했어요. 바로 한 레스토랑을 책임지는 부주방장에게 상당히 많은 권한과 책임, 신뢰와 인텐시브를 몰아주는 거예요. 핵심 인재를 탄탄하게 키워 놓으면 나를 빙의해 그 자리에 서있게 되죠. ‘그’와 다이렉트로 소통하는 부주방장을 보면서 수많은 요리사가 나도 언젠가 저 사람처럼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하는거죠. 이번에는 도쿄올림픽이 있기 전 미식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도쿄로 가요. 식재료 고유의 맛을 살리는 퀴진과 뭐든 매뉴얼화 해 위기관리 하는 능력을 배우고 싶어요.
Q. 이런 포부로 가득찬 이영라 셰프의 목표가 뭔지 궁금해지네요.
제 목표는 요리를 통해서 무언가 이루고 싶다? 아니요. 미쉐린 별? 아니요. 유명한 셰프? 아니요. 레스토랑을 몇 개 내는 것? 아니요. 바로 현장에서 이 일을 오래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려면 내 요리가 시장에 먹혀야 하고 누구보다 현역처럼 일해야 하지요. 요리책은 늘 보고 있지만 그것만 들여다봐서는 창의적일 수 없어요. 미술, 영화, 소설... 나를 자극할 수 있는 모든 요소에 나를 열어놓을 거예요. 대중성과 예술성을 사로잡은 영화계의 봉준호 같은 셰프가 되고 싶어요.
글 : 노혜영 / 디자인 : 강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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